광주민주화항쟁의 선두에 선 전옥주 선생님을 추모하며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분당신문 | 기사입력 2021/02/18 [08:08]

광주민주화항쟁의 선두에 선 전옥주 선생님을 추모하며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분당신문 | 입력 : 2021/02/18 [08:08]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우연히 목격한 반인권의 현장에서 분연히 일어나 폭압에 맞서 외쳤던 한 마디 

 

▲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분당신문]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죽임을 당한 후 독재정치가 무너졌다. 그 이후 열린 80년 민주주주의 봄은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로 또 다시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학생과 시민들은 유신 철폐와 신군부의 퇴진,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진행했고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했다.

 

이튿 날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계엄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전두환 일당은 공수 부대로 구성된 계엄군을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진압작전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그 현장에 전옥주 선생님이 있었다.

 

우연히 가게 된 광주도청 앞에서 마주한 참혹한 현장. 그러나 언론은 광주의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왜곡했다. 대학생들이 광주사람들에게 실상을 알려야 한다고 외쳤다. 시민들이 살육되는 현장에서 즉자적으로 이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전옥주 선생님은 그대로 동사무소로 가서 마이크와 앰프를 가져와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을 시작했다.

 

 “시민의 군대가 국가를 지키라고 쥐어준 총으로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전옥주 선생님은 차마 버스에 시신을 실을 수 없어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도청을 향했다. 그 길로 시민대표가 되어 전남도지사에게 계엄군 철수를 요청했다. 전옥주 선생님이 ‘광주시위대’의 얼굴로 불리었던 이유이자, 계엄군에 의해 “남파 간첩 모란꽃”으로 조작된 이유였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두 구의 시신을 봤어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되기 전이었어요.”

 

거리에 나서고, 동사무소로, 전남도청으로 향한 결과 전옥주 선생님은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고 간첩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81년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기 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석방된 이후에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며 병마와 싸워야 했던 전옥주 선생님은 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출석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옥주 선생님의 삶은 민주화 열망을 군부폭압과 반공이데올로기로 압살하고자 했던 군사정권이 자행한 만행의 증거이다. 선생님은 조작된 역사의 진실을 밝힌 증인이었다. 전옥주 선생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길거리에 내던졌습니다.”

 

“(당시) 민주화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를 몰랐으나 반민주와 폭압의 현장에서 시민군으로서, 시민군의 가두 방송자로서, 시민군에게 밥을 해주면서, 죽은 자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다친 자의 상처를 돌보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민주주의자가 된 여성들 가운데 전옥주 선생님도 있었다.

 

인간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짓밟는 자에 저항하는 것,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가치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을 존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전옥주 선생님은 삶으로 민주주의를 살아내어 보여주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한국사 곳곳에서 자유와 평등 평화의 가치를 위해 투쟁했던 선대 여성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하며 새로운 진보와 민주주의 길을 열 것이다.

 

 전옥주 선생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 이 글은 2월 17일 발표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의 논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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