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녀의 죽음_01

니나의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나였다

양성우 작가 | 기사입력 2019/03/29 [10:06]

러시아 미녀의 죽음_01

니나의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나였다

양성우 작가 | 입력 : 2019/03/29 [10:06]
   
▲ 분당제생병원 내과 전공의 양성우 작가

[분당신문] 니나카나예바, 대충 이런 전형적인 러시아 인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34세의 젊고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었다. ‘정말 인형처럼 예쁘고 멋진 언니' 간호사들은 첫 인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직업은 경찰이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에 대단한 미모, 바비인형의 콜라병 몸매까지 가진 그녀가 경찰 제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정말이지 헐리웃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런 굉장한 여배우 정도의 느낌이었다. 소셜 미디어라도 했다면 미모로 금세 유명해졌을 터이다.

이 예쁜 껍데기 안에 든 병명은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이었다.부유하지만 더 나은 치료를 기대해 한국으로 건너오는 다른 많은 러시아인들처럼, 그녀도 젊은 나이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우리 병원에서 치료 받은 기간은 총 6개월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투병은 힘들었다. 하지만 새로 사귄 친구는 아름다움에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니나의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당시 중환자실 야간당직을 맡아 하고 있었다. 병동에 있을 때 여러 번 니나의 주치의를 맡았기에 그녀와 보호자와는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의학적인 대화 이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글 번역기로 나누고는 했었다.

수차례의 항암치료를 진행했으나 암의 사이즈는 줄어들다 말기를 지속했고, 백혈구감소증 때문에 면역저하로 인한 감염이 잦았다. 항생제 치료는 당연히 병행해야 했다. 잘 낫지 않는 감염 때문에 한 번 입원하면 퇴원할 줄을 몰랐다. 

면역저하자가 감염을 맞았다면 곰팡이같은 무시무시한 균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항진균제도 썼다. 이 곰팡이약은 몸을 정말 피폐하게 만든다. 셀 수 없는 합병증들이 생겨났다. 또 많은 다른 암환자들처럼 혈전이 잘 생기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폐색전증이 생겼다. 숨쉬기도 힘들어 했다. 암은 뇌로도 전이했다. 가끔씩 그리고 긴 시간 간질발작(경련)을 하기도 했다.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갔다. 보호자는 딸이 호전되지 않지만 입원하고만 있는 상황에 지쳐 예민해졌다. 한편 니나도 힘들어했다. 더 이상 주사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팔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녀는 처음 입원할 때의 미모는 완전히 잃은 상태로, 멍한 눈으로 병실 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급기야 급성 종양용해 증후군(Tumor lysis syndrome)이 찾아왔다. 이는 치료 중 합병증의 하나인데 암세포가 죽으면서 혈류 내에 자신의 일부가 녹아드는 것이다. 이 때부터 그녀의 상태는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피는 산성화되었고, 나쁜 연료를 먹고 사는 모든 장기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때가 오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원체 말이 없는 사내였다. 190센티미터 쯤 되는 큰 덩치에 과묵하기까지 했으니 보는 모든 이에게 위압감을 줬다. 그가 한 번 의료진에게 짜증을 낼 때면, 솔직히 말하면 무서워서 가까이 가기가 싫었다. 러시아 남자는 통이 크다더니 정말 그랬다. 회진때마다 선물로 초콜렛에너지바를 주곤 했는데, 한 번에 30-40개씩 웅큼으로 줘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든 보호자에게 그렇듯 흐르는 시간의 고문은, 결국에는 이 강한 남자도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딸을 사랑했다. 아픔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딸이 살았을 때도 죽었을 때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굳건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했다. 불곰같은 이 사내가 마지막 순간, 내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든, 내 딸을 러시아로 보내 주오.’

딸은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풍경이 보고 싶다 했다. 그 풍경이 비록 공항의 활주로일지라도. 그는 사랑하는 딸을 낫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딸은 좌절하던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던졌다. 그는 마지막 과제물을 받고 불타 올랐다. 아비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였다.

‘러시아 전원이라니. 그것도 이런 중한 상태에서!’

난감하다.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아니면 내일, 그것도 아니라면 모레 죽을 상태였다. 그런데 주치의는 환자의 마지막 소원에 동의했다. 이제 나를 포함한 레지던트들은, 그 가느다란 목숨을 어떻게든 러시아 갈 때까지 살려놔야 했다. 

우리 의료진이 생명연장에 힘쓰는 동안, 국제 진료팀도발빠르게 움직였다. 비행기표 구매와 중환 이송에 수반하는 많은 문제들은 낮 동안 모두 해결됐다. 바로 내일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가 잡혔다.

같이 이송 가는 의료진은 내 레지던트 의국 동기인의국장으로 결정됐다. 같이 가는 간호사 하나 없이 홀로 블라디보스톡까지 환자를 모실 막중한 임무를 띤 그에게, 동기들은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이렇게 '러시아 전원'은 현실이 되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그리고 나는 오늘 밤 당직의사 였다.

- 다음 편에 계속 -

이 글을 쓴 분당제생병원 내과 전공의 양성우 작가는 2019년 1월 청년의사가 주최한 ‘한미수필문학상’ 장려상에 이어 “시사문단’ 3월호에 수필「술꾼의 인생」, 「러시아 미녀의 죽음」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양성우 작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와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한 늦깎이 의사로써 문단에서도 뒤늦게 실력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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