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태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매년 5.18민주묘역 찾아
"너는 불꽃이었다. 햇살이었다."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 ▲ 김종태 열사. 1979년 방위로 근무할 당시의 모습. |
[분당신문] 1980년 6월 9일 서울이화여대 앞 사거리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던 김종태 열사. 그를 아는 사람들은 43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다.
광주를 제외하고 흔치 않게 타지역(성남)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던 열사는 박정희 죽음 이후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일당에 대해 "유신 잔당들은 전원 퇴진하라, 계엄령을 해제하고, 군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를 외쳤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시민과 학생들에 대한 넋을 위로하며 마지막 성명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김종태 열사는 6월 9일 분신 이후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다 끝내 14일 운명했다.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그리고, 그가 외친 광주의 진실은 메아리가 되어 1995년 10월 13일 광주에서 희생된 인물을 제외하고 특별하게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인정한 인물로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 영면을 취하고 있다.
성남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고자 산화한 성남시민'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자 6.10항쟁 36주년을 맞아 구시청 앞 광장에서 10일 오후 3시에 '김종태 열사 오월 걸상'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 ▲ 김종태 열사를 기리기 위해 매년 6월이면 국립 5.18 민주묘역을 찾는다. |
이에 앞서 민주열사 김종태기념사업회(회장 이호룡)에서는 4일 김종태 열사가 잠들어 있는 국립 5.18민주묘역을 찾았다. 이날 참석한 30여 명은 김종태 열사를 잘 알고 있는 야학 교사, 김종태 열사의 두 동생, 그리고 성남민주화운동사업회, 주민교회와 주민신협 관계자 등에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호룡 민주열사 김종태기념사업회장은 "김종태 열사는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불살랐다"고 전했다.
아울러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을 고쳐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김종태 열사의 정신"이라며 "김종태 열사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할 때"라고 말했다.
![]() ▲ 국립 5.18민주묘역에서 김종태 열사 43주기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
김종태 열사와 성남과의 인연은 1970년 서울 미아리에서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성남 제일실업중고(비인가 천막 야간학교)를 시작(1974년 6월)으로, 1976년에는 당시 단대3동에 위치한 한울야학을 설립하고, 창곡동에는 어린이방 '형제단'을 개설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성남 금마실업에 다닐 때는 여성 동료를 돕다 폭력.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을 경험한 그는 이듬해인 1978년에 노동자 공동체 '형제의 집'을 만들었다.
1979년 방위 입대 이후에는 서울 미아리 동네 친구와 후배들을 모아 '조나단'이라는 독서회를 결성했으나, 그가 만든 한울야학은 경찰의 습격으로 폐쇄, 방위 신분이었던 김종태 열사는 안양 군기 교육대로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0년 광주 시민군 1호 탈출자 윤기현씨로 부터 들은 광주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끝내 자신의 몸을 던져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해가 김종태 열사와 같은 나이 때 박정희 정부에 대해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를 외치며 분신 사망한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지 10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