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당 근거지 다솔사, 만해 닮은 '황금공작 편백' 세 그루가 반긴다

유일환 기자 | 기사입력 2024/11/04 [15:43]

만당 근거지 다솔사, 만해 닮은 '황금공작 편백' 세 그루가 반긴다

유일환 기자 | 입력 : 2024/11/04 [15:43]

"만해(萬海)는 일제 탄압을 피해 다솔사 안심료에 머물렀으며, 이곳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지식인, 고승들이 모여 만당(卍黨)의 활동 중심부가 되었다"

 

▲ 다솔사 뒷편에 펼쳐진 차밭.

 

[분당신문] 경상남도 사천 다솔사(多率寺)는 신라 지중왕 4년(503)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영악사'라 불렀다가 선덕여왕 때 '다솔사'로 바뀌었다. 그후 '영봉사'라 하였다가 신라 말 도선국사가 부속 건물을 더 짓고 '다솔사'로 다시 바꿔 불렀다. 이후 전란으로 주요 건물들이 불에 타 여러 번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다솔사 대양루는 영조 34년(1758)에 지은 건물이다. 대양로는 다솔사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인 적멸보궁과 마주해 있고 대양루 좌우에는 스님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법당과 더불어 'ㅁ' 자 모양의 마당이 있다.

 

대양루는 다솔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건물이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물로서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앞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의 모습에 기둥 위에만 새 부리 모양의 재료를 써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맞배지붕은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옆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말한다.

 

▲ 다솔사 대양루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물로서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대양루 누각 마루 아래의 기둥들은 굵고 뒤틀어진 모양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스러우며, 마루 위의 기둥은 잘 다듬어 단정하다. 대양루의 앞뒤 기둥머리에는 길고 굵은 대들보를 하나만 세워 여러 개의 기둥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루 안의 쓰임새가 많으며 건축물의 구조적 가치가 돋보인다.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조직 '만당(卍黨)'의 근거지였다. 불교계 청년들은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해 만당을 조직했다. '만당(卍黨)'은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卍黨)'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사천 다솔사 안심료, 만해 한용운 12년간 은거

 

이곳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건물이다.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쳐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그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 안심료는 만해가 은거하면서 항일 비밀결사조직 만당을 조직한 곳이다.

 

또한 이곳 안심료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김동리는 친형인 김범부와 한용운, 최범술 셋이서 '소신공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영감을 얻어 김동리의 역작 <등신불>을 탄생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소신공양은 자기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치는 일을 말한다. 

 

만해 한용운 회갑 년 기념식수(황금공작 편백)

 

이곳 안심료 앞의 황금공작 편백 세 그루는  우리나라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만해 한용운이 1939년 회갑 년을 기념하여 최범술, 김법부, 김법린, 문영빈 등과 함께 식수한 기념수이다. 

 

만해(萬海)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여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명을 받았다.

 

만해는 1920년 독립선언 서명자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관에게 "조선인이 조선독립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도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어떤 나라든 자멸하는 것이지, 남이 망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민족 자존심을 내세울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다.

 

▲ 안심료 앞의 황금공작편백은 만해 한용운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식수한 기념수다.

 

만해는 1930년 불교청년회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만당'이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서울에서 조직하여 일본경찰로부터 탄압을 받자, 1933년 최범술의 권유로 다솔사 안심료에 머물렀다. 이곳에는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지식인, 고승들이 모여 만당의 활동 중심부가 되었다.

 

1937년 불교 항인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된 이후에도 만해는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홀동을 계속하다가 광복 1년 전인 1944년 서울 성북동에서 돌아가셨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인 <박명(薄命)>, 시집<님의 침묵 >을비롯해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에는 <한용운 전집> 6권이 간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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